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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승의 퍼스펙티브] ‘문명의 충돌’ 시즌2…서구의 가치가 시험대 올랐다

By 한반도평화만들기    - 26-01-12 10:46    4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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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의 새 계산법과 국제질서 변화

미국이 지난해 12월 발표한 국가안보전략(NSS)은 전 세계 외교정책 결정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 이유는 낯선 개념이나 자극적인 표현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국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더 이상 ‘규범을 통해 세계를 이끈다’는 전제를 유지하지 않는다. 그 결과가 베네수엘라에서, 중동에서, 동아시아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세계관 변화의 충격을 강하게 받은 곳은 유럽이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해법이나 방위비 분담, 무역 갈등은 이미 익숙한 쟁점이었다. 이번에는 차원이 달랐다. 유럽은 정책 실패의 사례가 아니라 쇠퇴하는 문명으로 호출됐다. 국제 규범을 함께 관리해 온 파트너가 아니라 평가와 교정의 대상이 됐다. ‘문명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에서 ‘문명의 소멸’이라는 조롱으로 옮겨가는 순간 유럽의 반응은 단순한 불쾌감을 넘어섰다. 놀라움과 분노, 깊은 자성이 동시에 나타났다.

서구 내부에서 시작한 문명 충돌
이 장면은 30년 전에 출간된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을 떠올리게 한다. 냉전 종식 이후의 세계를 서구와 비서구, 특히 서구와 이슬람 문명 간의 갈등으로 설명했던 이 책은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그 구도를 넘어선다. 문명의 충돌 시즌2는 더 이상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서구 내부에서 시작되고 있다.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된 자유주의, 다원성, 규범 중심의 질서 등 서구 문명적 기반에 대해 미국 정치의 중심부에서 다른 해석이 등장하고 있다. 물론 미국과 유럽 사이의 제도적 연결은 여전히 깊고 역사적 유대 역시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남은 임기 동안 서구 내부의 문명적 충돌은 불가피해 보인다. 이는 일시적 갈등이라기보다 서구 문명에 대한 자기 정의가 흔들리는 과정이다.

세계는 불편한 진실 앞에 서 있다.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이 바뀌고 있다. 미국의 힘은 여전히 강하지만, 그 힘을 정당화하던 규범은 빠르게 약화하고 있다. 이 변화는 유럽을 불안하게 만들고, 중국과 러시아에는 기회가 되며, 한국에는 가장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이제 우리는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

뒷전으로 밀린 규범과 가치
대서양 양측의 균열은 미국 보수주의 진영 내부에서 강화되는 문명 프레이밍을 드러낸다. 이 프레임에서 강조되는 것은 자유·인권·민주주의·다원성과 같은 전통적 가치가 아니라 기독교적 가치, 가족, 반이민 정서, 때로는 백인 중심적 문화 정체성에 가까운 요소들이다. 이러한 가치 조합이 미국 전체를 대표하는지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그러나 정책 결정의 핵심 집단에서 이 인식이 공유되고, 공식 문서의 언어로 제도화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서구 내부의 균열은 나아가 더 넓은 구조 변화와 맞물려 있다. 국제질서는 점차 서구-비서구의 구도를 넘어 강대국-비강대국의 질서로 재편되고 있다. 미국 보수주의 일각에서는 미국·중국·러시아·인도·일본 등 주요 세력권을 중심으로 세계를 관리해야 한다는 구상도 제기되고 있다. 이는 19세기 메테르니히 체제와 유사한 세력균형론에 가깝다.

이 구도에서 규범과 가치는 뒤로 밀린다. 대신 힘과 유용성이 전면에 등장한다. 강대국에 중요한 것은 가치의 공유가 아니라 거래의 효율성이고, 중견국에 요구되는 것은 ‘쓸모’다. 현재 시점에서 러시아는 규범이 실제로 강제되지 않는다는 점을 전쟁을 통해 시험해 왔고, 중국은 규범을 부정하기보다 상대화하며 거래의 정치화를 확대해 왔다. 두 나라 모두 대체 질서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규범이 약화된 불안정 자체가 전략 자산이 된다. 이것이 문명의 충돌 시즌2가 위험한 이유다.

비싸진 동맹, 거칠어진 국제정치
국제질서는 종종 ‘규범의 질서’로 묘사됐다. 그러나 규범은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다. 규범이 기능하려면 그것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고, 힘이 질서를 만드는 강제력으로 작동하려면 정당성이 뒷받침돼야 한다. 냉전 이후 서방이 누려온 상대적 안정은 바로 이 두 요소의 균형 위에 있었다.

미국은 압도적 군사력과 경제력을 통해 강제력을 제공했고, 유럽은 인권·자유·법치·다자주의라는 규범의 언어를 정교화했다. 미국의 힘은 규범을 통해 정당화됐고, 유럽의 규범은 미국의 힘에 의해 보호됐다. 이 분업 구조는 불완전했지만 작동했다. 동맹국들은 미국의 힘을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을 ‘질서를 유지하는 비용’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위기는 단순한 질서의 붕괴가 아니라 규범의 소진에 기인한다. 강제력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것을 정당화하던 언어와 절차는 빠르게 효력을 잃고 있다. 규범은 필요할 때만 호출되는 수사로 이동했고, 강제력은 대가를 청구하는 수단으로 바뀌었다. 동맹은 더 비싸지고, 국제정치는 더 거칠어졌다.

이 변화는 우연이 아니다. 미국 내부에는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자국의 비용만 키웠다는 인식이 누적돼 왔다. 동맹의 무임승차에 대한 피로, 중국·러시아와의 경쟁에서 느리고 복잡한 규범이 발목을 잡는다는 불만, 그리고 국내 정치의 문명 전쟁이 외교 언어로 확장되면서 규범은 점점 도구화됐다. 문제는 규범이 약해질수록 강제력의 지속 비용은 오히려 커진다는 역설이다. 정당성을 잃은 힘은 더 자주, 더 노골적으로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불편한 자리에 서게 된 한국
이 구조 속에서 가장 불편한 자리에 서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안보는 미국과 깊이 연결돼 있고 경제는 중국과 얽혀 있으며 북한 문제는 러시아와 중국의 계산 속에서 움직인다. 여기에 정권 교체 때마다 크게 흔들리는 외교 메시지까지 더해진다. 그래서 지금 한국 외교의 핵심 질문은 ‘누가 옳은가’가 아니다. 어떤 전략 구조를 만들어야 흔들리지 않는가다.

흔히 해법으로 ‘균형’이 제시된다. 그러나 균형은 지속 가능한 상태가 아니다. 설령 존재한다 해도 찰나에 가깝다. 친미가 곧 반중이 아니고 반미가 곧 친중도 아니다. 미국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지점이 자동으로 중국의 영향력 확대로 이어진다는 시소 논리는 현실을 과도하게 단순화한다. 실제 세계에는 그 사이에 훨씬 넓은 전략의 공간이 존재한다. 문제는 그 공간이 자동으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략 공간은 단순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만들어 나가야 한다.

한국이 중견국으로 자주 언급되는 이유는 군사력이나 경제 규모만이 아니라, 이 전략 공간을 열 수도, 닫을 수도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제조업 기반, 반도체와 첨단 기술 역량, 동북아에서의 지정학적 위치라는 분명한 유용성을 갖고 있다. 동맹을 일정 부분 ‘돈으로 살 수 있는’ 능력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단기적 실익만을 쫓는 실용주의는 중장기적으로 선택지를 줄인다.

한국에 필요한 전략 공간 설계 능력
한국에 요구되는 것은 노선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전략 공간을 설계하는 능력이다. 동맹은 단단히 고정하되 자동으로 끌려가지 않는 협상 구조, 중국과는 추상적인 ‘좋은 관계’가 아니라 원칙이 작동하는 예측 가능한 관계, 러시아와의 단기적 실익을 유럽과의 정치·경제적 신뢰라는 자산 관점에서 냉철하게 비교하고 관리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안보와 경제, 기술과 문화에서 한국이 가진 잠재력을 하나의 이야기로 묶어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주요 7개국(G7)과 주요 20개국(G20) 사이의 어딘가가 한국의 전략 좌표다. ‘가상의 균형점’을 수동적으로 찾기보다, 한국이 가진 자산과 잠재력의 조합을 현실적으로 드러내면서 능동적으로 외연을 넓혀야 한다.

특히 한국은 문화와 규범의 영역에서 과소평가된 잠재력을 갖고 있다. 민주주의의 경험, 압축적 산업화와 디지털 전환의 결합, 문화 콘텐트의 글로벌 영향력은 단순한 소프트파워가 아니라 국제사회가 한국을 바라볼 때 작동하는 규범적 신뢰 자산이다. 강제력이 거칠어지고 거래가 노골화될수록 이러한 자산의 가치는 오히려 커진다. 규범과 문화는 외교의 장식이 아니라 협상의 레버리지로 작동해야 한다. 문명의 재편에서 주체가 될 능력을 지닌 나라는 실제로 많지 않다.

지난 1년은 큰 혼돈의 시간이었다. 규범은 흔들렸고 동맹은 거래화됐으며 문명의 언어가 외교 전면에 등장했다. 그러나 혼돈은 동시에 기회의 순간이기도 하다. 문명의 충돌 시즌2에서 살아남는 국가는 균형을 찾는 나라가 아니라 구조를 설계하는 나라다. 중견국에게 미래를 설계해 주는 국가는 없다. 이제는 우리가 내비게이션을 다시 찍을 단계다. 문명의 충돌과 규범의 쇠퇴가 겹치는 세계에서 한국에 지금 필요한 것은 미래의 생존 공간을 설계하는 건축가적인 상상력과 치열한 토론이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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