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각수의 한반도평화워치] 나침반 없는 국제질서, 전략적 한·일 관계로 뚫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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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벽두부터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크게 흔드는 사건들이 줄을 잇고 있다. 미국의 베네수엘라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체포, 시민 봉기를 강경 진압 중인 이란 사태에 대한 미국의 개입 시사, 미국의 그린란드 강제 병합 시도와 유엔을 대신하는 기구인 가자 평화위원회 설립 추진 등 큼지막한 뉴스들이 이어지고 있다.
탈냉전 시대라면 10년에 한 번 보기 어려운 사건들이 한 달 사이에 한꺼번에 몰아칠 만큼 혼돈의 포스트 탈냉전 시대를 마주하고 있다. 트럼프 2기는 미국 우선주의, 규범보다는 힘에 의한 지배, 가치보다 이익 중심의 거래 외교, 관세 무기화, 다자 외교 경시 등 전후 외교의 기본 틀을 뒤집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요란한 뉴스 몰이에 성공했을지 몰라도 트럼프 2.0 외교에 후한 성적을 주기는 어렵다. 오히려 미국의 전략 자산인 동맹 체제가 흔들리고, 글로벌 사우스(남반구 위주의 신흥 개발도상국)로부터 소외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전략 경쟁 상대인 중국과 러시아를 이롭게 하고 있다.
동북아도 이런 소용돌이에서 자유롭지 않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지난해 11월 대만 유사시 일본의 개입을 시사한 언급은 중국의 거센 반발을 낳았다. 중국은 일본 수산물 수입 금지, 일본 관광 자제령, 희토류 수출 제한 등 대일 경제 제재에 나섰다. 일본을 외교적으로 압박하고, 일본 주변에서 군사 훈련을 하며 센카쿠(댜오위다오) 수역을 침범하는 등 강력한 ‘개집 외교(doghouse diplomacy)’를 전개하고 있다. 2012년 일본 정부의 센카쿠 국유화 조치에 대한 강압 외교보다 훨씬 강도가 세다.
국제질서 흔든 미국에 중국 가세
다카이치 총리가 전략적 모호성에 기초한 기존 일본 정부 입장에서 벗어나 평소 지론을 밝힌 건 외교 실책이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강경 태도가 지난해 10월 부산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을 계기로 유화적으로 바뀌고, 오는 4월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할 예정이란 사실을 다카이치 총리가 간과한 판단착오일 수 있다. 중국의 과격한 대일 공세는 미·일 동맹의 이간을 노리면서 주변국에 대한 살계경후(殺鷄儆猴·닭을 죽여 원숭이를 겁줘 길들인다)의 경고도 내포한 것이다.
일본 입장에선 중국에 공격당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을 두둔한 현실이 아픈 부분이다. 미국은 중국의 반발 직후 이뤄진 다카이치 총리와 정상통화에서 일본을 적극 지지하지 않더라도, 중국의 도 넘은 압박은 비판했어야 했다. 미국이 동아시아 지역에 잘못된 시그널을 준 셈이다.
이런 동북아 정세의 소용돌이 속에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4일과 13일 중국과 일본을 각각 방문했다. 계엄 사태로 한국 외교가 정체된 이래 새 정부의 본격적 인접국 외교다. 지난해 11월 경주 한·중 정상회담 이후 곧바로 이뤄진 이 대통령의 중국 국빈 방문은 중·일 관계가 경색된 가운데 한국을 끌어들이려는 중국의 의도와 4월 트럼프의 방중에 앞서 북한 관련 협의가 필요한 한국의 이해가 맞은 결과다. 사드 사태 이후 침체에 빠진 한·중 관계를 정상화한다는 의미도 있다. 중국은 의전에서 각별히 예우했지만 한국이 기대한 북한 문제나 서해 구조물 철거, 한한령 해제 등 실질적인 사안에 있어서는 진전이 없었다. 한·중이 대화와 소통의 길을 여는 관계 회복의 입구에 들어선 정도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사드 사태 이전의 전략적 협력 동반자 수준으로 되돌아가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먼 것이 현실이다.
다카이치 총리의 고향 나라에서 이뤄진 한·일 정상회담에서 일본은 이 대통령에 특별한 예우와 신경을 쓰며 양국 국민에게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셔틀 외교의 복원은 한국의 진보 대통령과 일본 보수 총리 조합의 불안을 털어내고 정상 간 신뢰를 쌓는 계기가 됐다. 이 대통령이 야당 시절 보였던 반일 자세를 버리고, 전임 정부의 관계 개선과 대일 약속을 이어받겠다는 입장이 이를 가능케 했다.
최고위 전략 대화로서 셔틀 외교가 2023년 이후 자리 잡으면서 한·일 관계가 안정화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이 대통령은 중국과 달리 일본과는 공동언론발표문을 통해 한·일 미래 협력의 방향과 구체적 협력 사안을 제시했다. 다만, 지역 협력 분야에서 한국은 ‘한·중·일’에 방점을 둔 반면 일본은 ‘한·미·일’ 협력을 강조해 양국의 시각차를 보였다. 이는 양국의 대중 관계에 대한 온도차가 존재하고 전략 이해가 다르다는 사실과 함께, 중·일 어느 일방에 치우치지 않고 가교 역할을 맡으려는 한국 정부의 의도가 작용했다고 본다.
한·일이 넘어야 할 두 고개
이번 셔틀 외교를 한·일 관계의 공고한 안정화로 연결하려면 두 번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 일본은 다음달 8일 중의원 해산 선거 결과가 중요하다. 26년간 자민당 연립 파트너였던 공명당이 야당 입헌 민주당과 합당해 자민당에 고민이 생겼다. 일본 정계의 다당화 흐름 속에 총리의 인기는 높지만 자민당의 지지율이 낮아 선거에서 승리를 낙관하기 어렵다. 한국은 6월 지방 선거에서 일본 문제가 불거질 경우 여당 내 대일 강경파의 목소리를 어떻게 억제하느냐가 양국 관계의 변수가 될 수 있다.
현재 수면 아래에 있는 과거사 현안도 넘어야 할 과제다. 강제 동원 문제는 ‘제3자 변제’ 방안을 실행할 기금이 고갈된 상태다. 기업 기부만으로는 피해자에 대한 변제가 한계가 있기에 정부 예산을 포함한 ‘문희상 제안’(한·일 기업과 국민의 자발적 성금)을 입법화하는 일이 시급하다. 2007년 민·관 합동위원회와 같은 기구를 설치해 과거사 현안들을 우리 주도로 양국 협력을 통해 해결하는 게 바람직하다. 이를 기반으로 건전하고 안정된 한·일 관계를 향한 2035년, 2050년 미래비전과 행동 계획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한·일은 동맹국인 미국의 불가측성, 중국의 공세적 대외정책, 북한 핵위협 고도화,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기반 침하, 민주주의 후퇴 등 대외 환경의 악화라는 유례 없는 강한 맞바람을 맞고 있다. 한·미·일 3각 협력 발전, 북·중·러 연대와 핵 위협에 대한 억지 확보,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지역 추진, 다각적 경제 협력 등을 추동할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조기에 구축해야 한다. 나침반 없는 혼돈의 국제 정세 파도를 넘는데 한·일 만큼 최적의 동반자는 없다.
신각수 니어재단 부이사장·전 외교부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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